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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다시 ‘이재명의 민주당’ 24-08-19 작성자 ghghwk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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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득표율 85.4%…김두관은 12.12%김대중 이후 24년 만에 연임 성공최고위원 5명도 전원 ‘친명’ 뽑혀
수락 연설서 정치 살려 희망을영수회담·여야 대표회담 제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가 18일 압도적 지지를 얻으며 대표직 연임을 확정했다. 야당 지지층이 대여 투쟁의 선봉장으로 이 대표를 택해 강력한 리더십을 부여한 결과로 풀이된다. ‘일극 체제’ 다지기에 성공한 이 신임 대표는 향후 대권가도에서도 유리한 입지에 서게 됐다.
이 대표는 이날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제1차 정기전국당원대회(전당대회)에서 총득표율 85.4%로 김두관(12.12%)·김지수(2.48%)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이 대표 득표율은 민주당 계열 정당의 역대 대표 경선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종전 최고 득표율은 이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대표 자신이 2022년 경선에서 기록한 77.77%였다.
이 대표는 앞서 전국 권역별로 총 15차례(17개 지역) 진행된 권리당원 온라인 투표에서 80~90%대의 압도적 지지를 얻으며 일찌감치 승리를 굳혔다. ‘어대명’(어차피 대표는 이재명) 기조는 ‘확대명’(확실히 대표는 이재명)으로 확장돼왔다. ‘구대명’(90%대 득표율로 대표는 이재명)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날 발표된 1·2차 국민 여론조사, 일반 당원 여론조사, 대의원 투표에서는 80% 안팎의 대승을 기록했다.
이 대표는 대표 수락 연설에서 정치를 살려 국민께 희망을 드려야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에게도 대표회담을 제안했다. 그는 무엇보다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한 대표님도 제3자 특검 추천안을 제안한 바 있으니 특검 도입을 전제로 실체규명을 위한 더 좋은 안이 있는지 열린 논의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대표직 연임은 24년 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 전신) 총재를 연임한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대표 연임 사례가 없었다.
이 대표의 대승에는 이 대표 중심의 단일대오를 꾸려 윤석열 정부에 대응해야 한다는 야당 지지층의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정국이 계속되고, 해병대 채 상병 사건 수사외압과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의 진상규명이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 일극 체제 비판이 제기됐으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5명을 뽑는 최고위원도 친이재명(친명)계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 대표의 ‘집권 플랜 본부장’을 자처한 김민석 의원이 18.23%로 1위를 기록했다. 이어 전현희(15.88%), 한준호(14.14%), 김병주(13.08%), 이언주(12.3%) 의원 순으로 선출됐다. ‘명심팔이’ 발언으로 논란이 된 정봉주 후보는 6위(11.70%)를 기록해 탈락했다.
재야 노동 변호사 출신김선수 전 대법관
워낙 사건이 많고 업무 긴장도도 높다 보니, 거기서 풀려난 측면에선 속 시원합니다. 하하하….
지난 8일 오후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선수 전 대법관(63·사법연수원 17기)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지난 1일 6년의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그는 1980년 이후 임명 제청된 대법관 중 첫 순수 재야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판사나 검사를 거치지 않았다. 1988년부터 대법관으로 임명된 2018년까지 약 30년간 노동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노동지형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법관 재임 기간에도 전문성을 발휘해 친노동·친인권 판결을 주도했다. 성과평가 대상에서 누락된 공기업 산하기관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라는 판결, 택시 기사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에서 노사 간 근로시간 단축 합의는 무효라고 한 판결 등이다. 퇴임 2주 전이던 지난달 18일 동성 동반자의 국민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의 주심도 그였다. 모두 동료 대법관들과의 치열한 토론과 설득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다.
대법관 생활은 어땠을까. 참여정부 때부터 힘써온 사법개혁을 비롯해 그가 대법관으로 지낸 지난 6년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생각은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김 전 대법관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 직접 겪어 보니 대법관 삶이 어떻던가요.
기록의 성벽에 쌓인 수도원이나 동안거 토굴 속 생활과 같은 삶이었어요. 화장실도 내실에 있어서 하루 중 제 방을 나올 일은 점심식사 때 한 번뿐이었죠. 저녁식사도 오후 4시쯤 직원이 간식으로 내주는 과일을 놔뒀다가 오후 5시30분쯤 떡 두어 개랑 같이 먹는 걸로 때웠거든요. 오전 8시10분에 사무실에 도착해 오후 8시30분에 퇴근할 때까지 방에서 재판 기록만 읽었어요. 정치적·사회적 표현에 제약이 있다 보니 대외활동을 삼가고,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인간관계를 거의 끊다시피 했죠.
- 모든 대법관이 그렇게 생활하나요.
평생 법관으로 살아온 대법관들은 상대적으로 좀 융통성 있게 생활하는 것 같았어요. 연수원 동기 모임이나 대학 또는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가고 휴가철에 외국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임기 동안 최대한 조심스럽게 살자 다짐하고 외국여행도 공식적으로 다녀온 것을 제외하곤 하지 않았어요.
-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재조(판사 또는 검사) 경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임명된 최초의 대법관이다 보니, 엄청난 양의 재판 업무를 수행할 역량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의 시선이 있었어요. 제가 기대에 부응하지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못하면 재조 경력 없는 유능한 인재들의 대법관 임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재판 업무 역량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해야 했어요. 더구나 최종심이기에, 방심에 의한 작은 실수조차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와 같은 집중력과 단순한 생활방식으로 매 순간 정말 초긴장 상태에서 온 힘을 기울였어요.
- 체력이 받쳐주던가요.
복잡한 기록을 읽어서 사건을 파악하고, 하루 종일 전원합의체 합의를 하기 위해선 체력이 받쳐줘야 했어요. 그래서 대법관이 된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산행을 하려고 노력했죠(그는 변호사 시절부터 등산 마니아로 유명했다). 주말 중 하루는 산행, 하루는 출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어요. 대법관 임용 직후에 법원산악회에 가입했는데, 산악회의 정기 산행은 한 달에 한 번이었어요. 나머지 주에는 혼자 산행하거나 아내와 함께 청계산에 올랐어요.
- 변호사 시절엔 주말 중 하루는 집에서 설거지 같은 가사노동을 했다고 했는데, 집안일을 도맡게 된 부인이 섭섭해하지는 않던가요.
아내가 이해해주고 전폭적으로 응원해줘 대법관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항상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주례사를 할 때도 신랑에게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엔 본인의 의견을 개진하되 최종적인 결정은 아내의 뜻에 따르라고 늘 당부하고 있죠. 하하하….
- 퇴임사에서 한 사람의 법관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또는 사회 구성원 한 사람의 인권 보장을 위해 필요하다면 국가권력 전체와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꽤 의미심장하게 들리더군요.
긴급조치 제9호 국가배상 사건 판결문에 오경미 대법관과 별개의견으로 쓴 내용이에요. 그 사건에서 ‘평균적인 법관상’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있었어요. 법관은 통치권자나 지배권력이 위헌·위법한 국가권력을 행사하려고 동원하는 도구로 전락해선 안 되고, 헌법에 의해 부여받은 권한과 책임을 다해 위헌·위법한 국가권력 행사를 견제해야 한다는 게 제 취지죠. 법관이 국가권력이라는 수레바퀴의 제동장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 대법원조차 권력의 눈치를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재임 중 권력의 압력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없었어요. 또 현재 법관이 권력의 압력 때문에 양심에 반하는 재판을 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대법원이나 법원도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기에 대법관이나 법관도 전체 사회의 정세와 세력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죠.
대법원의 재판은 극히 예외적인 일부를 제외하곤 주심대법관 1인의 단독재판이 아니라 소부 재판은 4명의 대법관이 전원일치 의견으로, 전원합의체 재판은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이 다수결에 따라 재판을 한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전합 판결로 선고한 노동 사건은 7건이었다. 그중 그가 다수의견에 가담한 게 5건이고 나머지 2건은 소수의견에 해당했다.
- 전합 판결로 선고된 가장 아쉬웠던 노동 사건은 뭐였나요.
국도관리원 차별임금 사건(국토교통부 산하 무기계약직 국도관리원들이 운전직 및 과속단속직 공무원들과 비슷한 일을 함에도 각종 수당과 출장비를 받지 못한 것은 헌법상 평등원칙과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차별적 처우라며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의견이 7 대 5로 소수의견이 됐을 때 자괴감과 한계를 절감했어요.
- 진보성향 대법관이 문재인 정부 때는 다수파였다가 윤석열 정부 들어 소수파가 됐어요. 대법원 구성이 바뀌면서 노동이나 인권 사건과 관련해 소신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친노동·친인권 판결이 이어졌더군요.
2000년 인사청문회 제도 도입 이후 취임한 모든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한 분도 빠짐없이 청문회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 보호가 법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임을 확인하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다짐했어요. 대법관들이 정치적 성향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순 있어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라는 사법부 본연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선 공감대가 형성돼 있을 거라 생각해요. 또한 노동과 인권 관련 쟁점은 대법원 판례가 어느 정도 축적돼 있어 그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고, 이를 건건이 전합으로 변경하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 퇴임 2주 전, 동성 동반자의 국민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 자격을 처음으로 인정한 전합 판결의 주심이었지요. 다수의견 도출까지 과정은 순조로웠나요.
퇴직을 1년 정도 남겨두고 남은 기간 의미있는 판결을 선고하고 퇴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 주심으로 배당된 사건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어요. 그중 이 사건이 있었어요. 연구관의 검토보고서를 토대로 해외 사례들을 확인하는 한편, 원고들이 겪고 있는 차별이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 문제임을 확신했죠. 대법관들이 치열한 토론을 거쳐 표결한 결과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안정적 다수의견(9 대 4)이 됐어요. 고등법원에서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을 한 게 안정적 다수의견 형성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대법원장님께서 다수의견에 가담해 주신 것도 큰 힘이 됐고요. 우리 사회가 좀 더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데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해요.
- 전합 판결을 앞두고 자신의 판단이 다수의견이 되게 하려면 동료 대법관들을 설득하는 것도 관건일 테죠. 가장 격렬했던 토론, 집요한 설득이 필요했던 사건은 뭐였습니까.
노동사건 전합 판결은 거의 다 그랬고,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군인 추행 사건, 긴급조치 제9호 국가배상 사건, 미성년 자녀를 둔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사건, 제사 주재자 사건 등 하나하나가 치열한 전합 토론이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깨달은 게 ‘스리 도’, 이 3개의 부사를 자주 쓰면 다수의견이 되기 힘들다는 거였어요(웃음).
- 스리 도요?
도대체, 도무지, 도저히요. 특히 내가 소수의견일 것 같은 쟁점의 경우 상대방 견해를 세게 비판해서 좀 흔들어놓자는 마음으로 초기에 이런 강력한 부사를 동원했어요. 그런데 되레 상대방 견해를 더 굳건히 만드는 결과가 나오더라고요(웃음). 또 한편으로, 중요 쟁점의 전합 사건들은 법리상으론 어느 쪽이나 일리가 있어서 법리적으로만 주장해선 설득이 어려워요. 법리 이외의 뭔가를 지적해 호소해야 하죠. 그래서 늘 토론 후 표결 전에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글을 A4용지 몇 장 분량으로 정리해 낭독했어요.
- 표결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요.
연구관이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검토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하면, 각 대법관별로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을 연구관에게 지시해 받아본 다음 대법관 회의를 통해 토론을 벌이죠. 그런 다음 최종적으로 각자의 의견을 내고 표결 쟁점을 정한 뒤 표결을 해요. 방식은 후임 대법관부터 순서대로 상고 기각인지, 상고 인용(파기환송)인지를 구두로 밝히는 거예요. 선임이 먼저 하면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요. 주문이 일치해도 특정 쟁점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은 별개의견으로 첨부하고요.
- 표결 결과가 선고 때까지 변함없이 쭉 이어집니까.
꼭 그렇진 않아요. 보통 두 달 정도 후에 있는 선고 전까지만 어느 쪽인지 결정하면 되니까 표결이 끝난 후 견해를 바꾸는 분도 계세요. 그 과정에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바뀌기도 하고 여러 우여곡절이 생겨요.
- 대법관들 간 격론이 오가고, 또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나요.
전합 합의를 마치면 대법원장 관사에서 만찬을 해요. 그러면서 푸는 거죠. 참여정부 때 독수리 5형제 중 한두 분은 전합이 끝나고 한 달 정도는 얼굴도 보기 싫다며 같이 밥도 안 먹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제가 재임할 때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웃음).
-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으로 고발된 황운하 당시 치안감이 사표를 내고 총선에 출마한 데 대해 사퇴 기한 내에 사표를 냈다면 수리되지 않아도 출마할 수 있다고 판결했지요. 이후 이성윤 민주당 의원, 이규원 조국혁신당 대변인 등이 그 혜택을 누리면서 보수언론에선 수사나 재판을 받는 공직자들이 선거 출마를 도피처로 삼을 수 있는 발판을 김 전 대법관이 마련했다고 비판하더군요.
황운하 사건 판결이 문제가 아니라 법률조항이 문제입니다. 공직선거법 제53조(공무원 등의 입후보) 제4항은 ‘제1항부터 제3항까지의 규정을 적용하는 경우 그 소속기관의 장 또는 소속위원회에 사직원이 접수된 때에 그 직을 그만둔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어요. 이 규정이 있는 한 달리 해석하는 것은 문언해석에 반하므로 허용될 수 없죠. 또 전합이 아닌 소부 판결로 선고한 것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던데, 이 사건은 판례 변경 사안이 아니고, 문언해석상 다른 해석의 여지도 없을뿐더러, 전합 판결로 소수의견을 쓰겠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대법관도 없었어요.
김 전 대법관은 전북 진안에서 출생(1961년)해 국민(초등)학교 6학년 때 의정부로 올라왔고,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대한통운 소속으로 서울역에서 하역노동에 종사했다. 1979년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고전연구회에 들어가 <논어> <맹자> <노자>를 읽었다. 학생운동 중 검거돼 강제징집됐다. 제대 후 2년 만에 사법시험(27회)에 수석 합격했다. 연수원을 마친 후 곧장 인권변호사인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30년간 수많은 노동·인권 사건을 맡아 판례를 바꾸고 법률을 개정시켰다. 서울대병원 법정수당 소송, 골프장 캐디 등 특수고용자의 노조 설립신고 소송, 콜트·콜텍의 정리해고 사건, 공무원노조 창립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 윤석열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동기죠.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1985년 사법시험 3차 면접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같은 해 사법시험의 2차 낙방생인 윤 대통령이 당시 권력 실세인 이종찬 민정당 의원(현 광복회장)의 집에 데리고 가 선처를 호소했다죠.
저와 같이 강제징집 등 사정이 있었던 사람 몇명이 면접에서 불합격 처분을 받지 않을까 우려해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부탁을 드렸어요. 서울대 법대 학장과 총장을 찾아갔고, 마지막으로 안기부에 근무한 후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계시던 이종찬씨(현 광복회장)를 찾아가기로 했어요. 대학 동창인 이철우 (현 연세대) 교수의 아버님인데, 당시 철우가 입대했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본인은 2차 시험에 불합격했지만 동창의 합격을 위해 우리 일행을 이종찬씨 집으로 안내해 준 거예요. 어떻게 보면 당시 윤 대통령에게 신세를 졌다고 할 수 있죠.
- 윤 대통령과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습니까.
이후 저는 변호사로서 민변 등의 활동에 전념하고, 윤 대통령은 검사로서의 삶에 전념하느라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대법관이 된 후에는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에 취임한 후 대법관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사무실을 들렀을 때, 그리고 부친상을 당했을 때 문상을 가 인사만 했어요.
-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018년 10월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자, 윤석열 정부는 ‘제3자 변제’ 해법을 내놓았어요.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그건 노코멘트할 게요.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잘 처리할 것이라 믿어요. 하하하….
-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와 친밀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민변에서 같이 활동했고, 서울대학교 노동법연구회에서도 종종 만났어요. 이 전 대표가 검사 사칭 문제로 구속영장이 청구됐을 때 공동변호인 중 한 사람으로 변론에 참여했어요. 또 성남시장 시절 청년수당 등 복지정책을 위한 예산을 성남시의회가 의결한 것에 대해 경기도지사가 지방의회 의결 취소 소송을 제기했을 때에도 성남시장의 공동대리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고요. 그래서 이 전 대표의 선거 관련 대법원 사건에 대해선 회피신청을 한 거예요. 대법관이 된 이후엔 만난 적이 없어요.
- 대법원에 온 상고사건 접수 건수가 수만건에 달하다 보니, 민사·행정 사건의 70%를 심리불속행 판결로 기각한다죠. 대법관이 되기 전엔 심리불속행 제도 폐지를 주장했던 것으로 알아요.
생각이 달라졌어요. 현재의 상고심 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선 그 많은 사건의 처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심리불속행 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어 보여요. 그리고 심리불속행 기각 사건은 마치 대법관이 기록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처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선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하는 사건도 주심대법관은 최소한 세 번 이상 기록을 읽어보고, 또한 4명의 대법관이 합의를 통해 최종 결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요.
- 변호사 시절, 상고제도 개선 방안 중 대법관 증원 방안을 지지했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좀 바뀌었어요. 그동안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지만 결국 모두 입법에 모두 실패하면서 그 어느 방안도 정치역학관계상 실현되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사실상 포기하고 사실심을 강화해 상소율을 감소시키는 정도로 가고, 상고제도에 대해선 국회에서 입법을 해준다면 따라갈 용의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을 정리했죠. 사실심 강화를 위해선 법관 증원이 필요해요. 국회가 법관 증원 법률개정안을 신속히 처리해 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신규 법관 임용 트랙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 김 전 대법관 등의 후임으로 모두 판사들이 임명되면서 ‘법조 일원화’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가 다시 깨졌어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재야에서 활동한 대법관이 각 부에 1명씩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 후임 대법관으로 재조 경력 없는 훌륭한 분이 임명되기를 기대했는데, 이어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죠. 칠레의 경우 대법원장을 포함한 21명의 대법관 가운데 5명은 법관이 아닌 사람 중에서 임명하도록 아예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어요. 칠레 대법원을 방문했을 때 칠레 대법원장께선 비법관 출신 대법관들이 법관 출신 대법관들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 심도 있는 토론과 올바른 결론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셨어요.
- 퇴임 후 현시점의 사법개혁 과제들을 입법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요. 특히 꼭 이루고자 하는 입법과제는 뭔가요.
재정신청 제도 개선과 영장 단계 조건부석방 제도, 민사소송에서의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조속히 입법되길 바라고, 장기적 과제 중에선 노동법원 도입이 이뤄지면 좋겠어요. 또한 일반적 징벌배상 제도가 도입되면 좋겠지만, 어렵다면 하급심 법관들이 위자료를 대폭 인정해주면 좋겠어요. 특히 악의적인 불법행위(명백한 허위사실 보도로 명예살인을 하는 행위 등)나 판결을 무시하는 행위(해고무효확인 판결이 확정됐음에도 원직 복직시키지 않는 행위 등)에 대해선 더 이상 그런 행위를 반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액수의 위자료를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설계한 것에 기초한 우리나라의 사법 제도와 체계도 변화가 필요해요.
- 어떻게요.
사법 서비스의 공급자인 법관이 모든 분쟁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법관 위주의 사법 제도가 기본 축을 형성하고 있는데, 포스트 김병로 사법체계, 즉 사법 서비스의 수요자인 국민 위주의 사법 제도로 발전하는 게 필요해요.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법원(시군법원의 활성화 등), 국민과 함께 결정하는 법원(배심재판의 활성화, 사법행정에의 국민 참여 등), 재판을 통해 법치를 확고히 세우는 법원(위자료의 현실화 등) 등이죠. 이를 통해 국민에게 신뢰받는 법원, 나아가 국민에게 존중받는 법원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 9월부터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출강하는데, 향후 로펌으로 가거나 변호사 개업을 할 생각도 있습니까.
이미 대법관 임명을 위한 인사청문회에서 대법관 퇴임 이후 변호사 활동, 특히 영리적 목적의 송무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어요.
그러면 국가를 위해 어떤 역할을 요청받는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기회가 있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고향 마을엔 미친년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시절엔 동네마다 미친년이 한 명씩 있었다. 신기하게 미친놈은 잘 없었다. 여성이 몇 곱절은 더 힘들었던 시절이라 그랬을 테지 짐작한다. 미친년이라 표현하는 것을 부디 양해하시길. 야만의 시대를 옹호하려 함이 아니니까.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폭로하기 위함이니까.
우리 동네 미친 할매에게는 택호가 없었다. 첩이었던 복이 어매처럼 자식의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했다. 자식이 셋이나 있었는데도. 이름이든 뭐든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몇 군데 전화를 해봤다.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었다는 것 외에 자식의 이름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향에 내내 살지도 않았던 내가 그이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신기해했다.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첩보다도 종보다도 더 낮은 존재였는데. 아니,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닌 존재였는데.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던 할매는 지금 생각해보니 내 부모 또래였지 싶다. 할매의 막내가 나와 동갑이었으니까. 우리 마을에서 도보로 30분쯤 떨어진 윗마을 사람인 미친 할매는 사시사철, 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우리 마을 앞을 지났다. 누르스름한 광목으로 지은 똑같은 한복을 입고. 워낙 이른 새벽인 탓에 길 떠나는 할매를 본 기억은 몇 번 되지 않는다.
명절이었을까? 웬일로 일찍 일어나 누군가의 집에 다녀오던 나는 길 떠나는 할매의 뒷모습을 보았다. 엊저녁에 빨아둔 한복이 채 마르지 않았는지 얼어붙은 치맛단이 버석거렸다. 내가 최초로 미친 할매를 미친년이 아니라 사람으로 본 날이기도 하다. 방에 있어도 추위가 뼈에 스며 어른이나 아이나 아랫목만 파고드는 산골의 겨울, 저 할매에게는 얼어붙은 옷을 입고서라도 기어이 가야 할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고백하건대 나는 그날 할매의 길 끝에 사랑하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망측한 상상을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시집와야 했던 고통이,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사랑이 할매를 미치게 했을 거라는 그럴듯한 추론도 했었다. 상상 덕분이었는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멀어지는 할매의 뒷모습이 여느 때와 달리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복이와 복이 어매
삐뚤이 할매
할매가 된 엄마
할매는 저녁 밥때가 되기 직전, 시계도 없는데 시계처럼 정확하게 우리 마을 앞을 지났다. 밥을 기다리며 골목에서 이런저런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와, 미친년이다! 고함을 지르며 할매 곁으로 모여들어 때로는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아이답게, 잔인하게. 할매는 초점 없는 눈으로 정면만 응시한 채 묵묵히 계속 걸을 뿐이었다. 한 번도 눈을 부라리거나 발을 구르거나, 어린 우리를 위협하지 않았다.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할매는 벙어리였다.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말을 잃게 한 것인지, 원래부터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할매는 누군가 막아서면 옆으로 걸었고, 또 막아서면 또 옆으로 걸었다. 걸음을 멈추면 심장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한둘을 제외하고 동네 어른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잔인한 놀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할매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장난감이었으니까.
사람이 아니었던 할매는 어느 날부턴가 모습을 감췄다. 할매의 막내아들이 아이 주먹만 한 감이 다닥다닥 매달린 감나무에 저도 감인 양 매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였다. 방학 직전 할매는 아들이 다니는 읍내 중학교를 찾아갔다. 미친 와중에도 아들의 얼굴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 까까머리에 교복,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운 무리 속에서 기어이 아들의 얼굴을 찾아내 반갑게 손을 잡아끌었단다. 사람이 아닌,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한 어미의 존재를 친구들 모두에게 들키고 만 어린 아들의 심정을, 고작 빨갱이의 딸이었던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움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내 고향은 물론이고 읍내에서도 보기 드물게 잘생겼던 해사한 아이는, 수줍었으나 뛰어나게 공부도 잘했던 아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자신만의 세상으로 도망쳤던 할매도 물론 세상에 없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나는 모른다.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야만의 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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